11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용(李錫庸)선생 | |
부서 | 공훈심사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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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 11. 29 ~ 1914. 4. 28(음 4.4)) 만번 죽어도 변치 않은 의병장 ◈
선생은 전북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던 선생은 1897년 8월, 10여 명의 동학과 함께 진안의 도동서려(桃洞書侶)로 이거하여 학문연마에 전심전력하였고, 이후 면암 최익현과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아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의병봉기가 본격화되었다. 선생은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의병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최익현 등 12의사의 체포로 의진이 해산되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1906년 가을, 선생은 고광수 등과 거의 방략을 협의하여 1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전북 마이산 자락 용암에서 고천제를 지낸 후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안읍을 공격, 헌병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파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907년 음력 11월 의병을 다시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한 선생은, ‘의진약속’, ‘의령10조’를 통해 전투력을 향상시키고 군율을 정비하여 군경과 시설물을 공격하고,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자위단의 처단에 앞장섰으며 임실, 장수, 남원, 함양, 구례 등을 비롯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전라북도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이끌었다. 선생은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원수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며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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